제목 : 몰입의 즐거움(Finding Flow)/해냄
저자 : 미하이 칙센트미하이/이희재 옮김
< 목 차 >
1. 일상의 구조
2. 경험의 내용
3. 일과 감정
4. 일의 역설
5. 여가는 기회이며 동시에 함정
6. 인간관계와 삶의 질
7. 삶의 패턴을 바꾼다
8. 자기 목적성을 가진 사람
9. 운명애
<내용초록>
1. 일상의 구조
참다운 삶을 바라는 사람은 주저 말고 나서라. 싫으면 그뿐이지만, 그럼 묫자리나 보러 다니든가.(오든)
나는 이 책에서 현대 심리학이 알아낸 성과와 내가 연구한 내용에 바탕을 두면서도, 선인들이 후세에 남긴 뜻 깊은 지혜를 고루 동원하여 바람직한 삶의 길을 찾아 나설 작정이다. ‘바람직한 삶은 어떤 것인가?’ 나는 다시 한 번 겸허하게 묻고 싶다.
내가 만난 사람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기관차 공장의 60대 초반의 ‘조’라는 사람을 보면서,
무엇이 평범한 한 사람의 인생을 이토록 값지게 만드는 것일까? 나는 그 답을 알아내고 싶었다. 이 책에는 중요한 세 가지 전제가 깔려 있다.
첫째, 중요한 진리는 이미 오래 전에 뛰어난 예언자·시인·철학자가 말했고 그것은 지금도 우리네 인생의 지침으로서 요긴하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선각자들이 깨달은 진리는 옛날식으로 표현되었으므로 후대의 시각으로 그 안에 깃든 의미를 늘 재음미하고 재해석해야 생명력이 사라지지 않는다. 여러 종교의 성전의 내용은 여전히 중요하지만, 그러나 과거의 글은 절대불변의 영원한 진리를 담고 있다고 맹신하는 자세에도 문제는 있다.
둘째, 지금 인류에게 가장 중요한 정보가 주로 과학에서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좋든 싫든 간에 현재로서는 과학이 현실을 담아내는 가장 신뢰할 만한 거울이다. 과학을 무시하려는 발상은 위험천만하다.
셋째, ‘삶’의 뜻을 진정으로 이해하려면 선인들의 지혜에 귀 기울이는 한편 그 지혜를 과학이 꾸준히 축적해온 앎과 접맥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의 사실과 미래의 가능성을 현재의 시점에서 이해하려고 꾸준히 노력할 때, 비로소 우리는 삶의 길을 깨달을 수 있다.
삶이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 그리고 이것보다 한층 절박하게 다가오는 질문, 다시 말해서 ‘어떻게 하면 한 사람 한 사람이 훌륭한 삶을 살 수 있을까?’하는 의문에 답하기 위하여 나는 지난 삼십년 동안 주로 심리학·사회학 같은 사회과학을 수단으로 삼아 체계적 현상학을 발전시키는 데 아낌없는 노력을 기울였다.
인생에서 부여받은 기회의 차이는 아직도 엄연히 존재한다. 미국의 대도시 빈민가에서 태어난 아이가 평생 살아가면서 과연 어떤 경험을 하리라고 기대할 수 있을까? 미국 교외의 넉넉한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가 기대할 수 있는 삶의 질과 빈민가에서 태어난 아이가 기대할 수 있는 삶의 질은 얼마나 다를까? 불행하게도 인생은 공평하지 않다. 어떤 사람은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가정에서 설상가상으로 선천성 장애를 안고 태어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어마어마한 재산을 가진 집에서 준수한 외모에 건강한 신체를 가지고 태어난다.
하나의 눈송이는 어떤 눈송이와도 모양이 같지 않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한 사람이 인간이라는 사실만으로도 그가 어떤 경험을 하게 될지 대충은 예상할 수 있다.
이 책에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인간의 의식(意識)에 유연성이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개인이 주도적으로 선택하여 현실을 바꾸어 놓을 수 있는 여지는 얼마든지 있다. 운명의 굴레를 박차고 나설 수 있는 가능성이 가장 높은 사람은 바로 이런 믿음을 가진 이들이다.
삶은 행동하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 다시 말해서 경험이다. 그런데 경험은 시간 속에서 이루어지므로 시간은 아주 귀중한 자산이다.
모든 여가 활동 중에서 사람의 정력을 가장 많이 흡수하는 TV시청은 인류가 경험한 가장 새로운 활동 형태이기도 하다. 인간이 수배만 년 동안 진화하면서 만들러낸 발명품 가운데 TV처럼 중독성이 강하고 흡인력 있는 물건도 없다.
시청자를 성숙시키는 프로보다는 자극시키는 프로가 많으므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시청하는 프로는 자아개발에 별반 도움이 되지 않는다.
2. 경험의 내용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가느냐는 우리가 하는 일과도 관계가 있지만, 그보다는 자기가 하는 일을 스스로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경험의 내용과 더 관계가 깊다.
사랑·부끄러움·고마움·행복을 정말로 느끼는지 판가름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 자신뿐이라는 점에서 감정은 의식의 주관적 요소라고 말 할 수 있다. 그러나 감정은 의식을 가장 객관적으로 담아내기도 한다. 사랑에 빠질 때, 수치심을 느낄 때, 겁을 먹을 때, 행복에 겨울 때 우리를 강타하는 ‘실감’은, 우리가 외부세계에서 관찰하는 그 어떤 것보다도, 혹은 우리가 과학이나 논리학으로 깨우치는 그 어떤 지식보다도 생생하다고 말할 수 있다.
긍정적 감정의 전형이 있다면 그것은 행복이다. 우리가 일하는 궁극적 목표는 행복을 체험하기 위해서라고 강조한 사상가는 아리스토텔레스 이후로도 한두 명이 아니다. 우리가 재산·건강·명예를 바라는 것은 그 자체가 좋아서라기보다 이런 것들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리라는 기대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행복은 우리에게 뭔가를 가져다주기 때문이 아니라 그 자체가 좋은 것이라고 여겨지기에 우리의 추구 대상이 된다. 하지만 인생의 노른자위라고 일컫는 이 행복에 대해서 우리는 과연 얼마나 알고 있을까?
대다수 사람들은 아무리 불완전할지언정 살아 있음을 기쁘게 여긴다.
장 폴 사르트르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허위의식’, 즉 자기가 살고 있는 세상이 가장 좋은 세상이라는 의식 속에서 살아간다고 꼬집었다.
수긍이 가면서도 놀라운 연구결과가 또 하나 있다. 그것은 물질적 풍요와 행복의 상관관계다. 놀라운 것은 한 나라 안에서 개인의 경제력과 삶에서 느끼는 만족감 사이에는 아주 미미한 상관 관계밖에 없다고 하는 사실이다. 미국의 억만장자는 평균 소득을 가진 사람보다 아주 조금 더 행복할 뿐이다.
빈곤의 문턱을 일단 넘어서면 재산이 늘어난다 하더라도 그것이 행복으로 직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행복을 얼마나 느끼느냐는 주어진 상황보다는 개인의 성향에 좌우된다.
자신이 능동적이고 강인하다는 느낌이 들면 그만큼 거기서 맛보는 행복감도 커지기 마련이어서, 시간이 흐르면 우리가 선택한 일이 행복감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삶의 질을 좌우하는 것은 행복감만은 아니다. 행복해지기 위해 그 사람이 어떤 일을 하는가도 삶의 질을 좌우한다. 자신의 존재에 의미를 주는 목표를 개발하지 못하거나 자신의 정력을 충분히 써먹지 못할 경우, 우리는 좋은 감정의 극히 일부만을 맛보게 된다.
꿈이 없고 위험이 따르지 않는 삶은 옹색하기 짝이 없다.
감정은 의식 안의 상태를 말한다. 슬픔·두려움·떨림·지루함 같은 바람직하지 못한 감정은 마음속에 ‘심리적 엔트로피’를 조성한다. 무질서 정도를 뜻하는 엔트로피 상태에 빠지면 우리는 바깥일에 집중하지 못한다. 내부의 질서를 다시 세우는 데 온통 신경을 쏟아야 하기 때문이다. 행복·과단성·민첩성 같은 바람직한 감정은 ‘심리적 반(反)엔트로피’의 상태이다. 이때 우리는 스스로를 되돌아보거나 추스르는 데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없으므로 아무 걸림돌 없이 정력을 우리가 선택한 과제로 온전히 투입할 수 있다.
우리는 주어진 과제에 관심을 쏟는 것을 지향점 또는 목표를 설정했다고 표현한다. 목표를 얼마나 끈질기고 일관되게 추구하느냐는 동기부여가 얼마나 잘 되어 있느냐에 달려 있다. 의도·목표·동기 부여는 심리적 반엔트로피를 조성한다. 정신력을 한 곳에 집중시키고 작업의 우선순위를 조정하면서 의식 안에 질서를 세우는 것이다. 질서가 없으면 정신적 과정은 두서가 없어지고 감정의 질은 급격히 저하된다.
우리는 하루의 삼분의 일은 좋아서 하는 일을 하고, 삼분의 일은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일을 하며, 나머지 삼분의 일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일을 한다. 사람들은 자기가 하는 일이 자발적일 때 가장 만족스러워하지만, 의무감 때문에 하는 일 역시 크게 불만스러워 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가 많이 있다. 심리적 엔트로피는 딱히 할 일이 없을 때 하는 일에서 가장 높게 나타났다.
결국 내적 동기부여(이것을 하고 싶다)든 외적 동기부여(이것을 해야 한다)든 목표를 가지고 있는 것이 집중을 해야 할 어떤 목표도 갖지 못하고 마지못해 일을 하는 상태보다는 삶의 지을 끌어올려 준다. 동기 부여의 필요성을 절감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삶을 개선할 수 있는 여지가 우리에게 그만큼 많다는 뜻이다.
의도의 경우는 정력이 단기간에 투입되는 반면, 목표는 좀더 장기적으로 투입된다. 우리가 도달하려는 자아의 모습을 결정짓는 것이 바로 우리가 추구하는 목표다.
일관된 목표의 추구 없이 일관된 자아를 만들어 가기는 어렵다. 뚜렷한 목표 의식을 가지고 정력을 제대로 투입해야 한 사람의 경험에 질서가 생긴다. 예측이 가능한 행동·감정·선택에서 드러나는 이 질서는 시간이 흐르면 개성 있는 ‘자아’로서 우리 눈앞에 나타난다.
한 사람이 세우는 목표는 그의 자부심에도 영향을 미친다. 자부심은 기대와 성공의 비율에 좌우된다.
의도와 목표를 두고 사람들이 흔히 품는 오해가 있다. 가령 힌두교나 불교처럼 갈래가 다양한 동양의 종교들은 행복에 이르려면 욕망을 버리라고 가르치는데 이것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다. 즉 모든 욕망을 포기하여 더 이상 목표가 존재하지 않는 상태에 도달해야만 불행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동양 종교를 이런 식으로 파악하는 것은 너무 피상적이다. 따지고 보면 욕망을 뿌리뽑겠다는 것 자체가 엄청나게 달성하기 어려운 목표이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 유전적·문화적 욕망이 철저히 뿌리내리고 있으므로 이것들을 잠재우려면 거의 초인적인 의지가 있어야 한다. 마음 가는 대로 살면 목표를 정해야 하는 굴레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저 본능과 교육이 자신들에게 던진 목표를 맹목적으로 좇는 것에 불과하다.
동양의 종교가 가르치는 내용은 목표를 덮어놓고 부정하라는 것이 아니다. 우리 마음속에 저절로 생겨나는 의도는 신뢰할 수 없는 것임을 말하고자 할 따름이다. 궁핍하고 위험한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다보니 우리의 유전자는 부득불 탐욕스러워지고 남들 위에 군림할 수 있는 힘을 갈망하게 되었다.
관성은 무시 못 하는 것이어서 우리가 가진 목표의 대부분은 유전과 문화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불교가 우리에게 억눌러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은 바로 그런 목표다. 하지만 그러려면 어마어마한 의지가 필요하다. 요가 수행자나 승려는 타성에 젖은 목표가 의식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것을 막느라 전력투구하는 사람들이므로 다른 일을 할 수 있을 만한 여력이 거의 없다. 동양 종교에서 말하는 수행은 서구인이 통상적으로 일고 있는 내용과는 정반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신의 목표를 다스리는 요령을 터득하는 것은 성숙한 삶으로 나아가는 중요한 첫걸음이다. 그것은 자연발생적 욕망에 몸을 맡기는 것과도 다르고, 욕망을 무조건 억압하는 것과도 다르다.
최선의 방안은 자기 욕망의 뿌리를 이해하고 그 안에 숨어 있는 편견을 인식하면서, 사회적·물질적 여건을 지나치게 흩뜨리지 않는 한도 내에서 자신의 의식에 질서를 가져올 수 있는 목표를 겸허하게 선택하는 것이다.
우리가 사고라고 부르는 것은 정신력에 질서가 갖추어지는 과정이기도 하다. 감정은 유기체를 접근이나 회피의 태세로 움직여서 주의를 집중시키며, 목표는 욕망하는 대상의 모습을 제시하여 주의를 집중시킨다. 사고는 의미 있는 방식으로 서로 연관되어 있는 이미지의 연쇄를 낳아 유기체의 주의를 집중시킨다.
집중하지 못하면 의식은 혼돈에 빠진다. 마음은 평상시에는 정보의 무질서 상태에 놓여 있다. 생각은 논리적 인과관계에 따라서 가지런히 배열되는 것이 아니라, 두서없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얽혀 있다. 집중하는 요령을 터득하지 못하면, 다시 말해서 노력을 한 곳으로 모으지 못하면 사고는 아무런 결론에 이르지 못하고 지리멸렬해진다.
감정의 흐름을 거슬러야 할 경우엔 집중하기가 쉽지 않다. 수학을 싫어하는 학생은 한자리에 가만히 앉아서 수학책에 실린 정보를 흡수하기가 여간 고역이 아니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강한 자극(시험에 붙어야 한다 든가 하는)이 필요하다. 정신적 과업이 어려울수록 집중하기도 그만큼 어려워진다. 그러나 자기가 하는 일을 좋아하고 그 일을 하겠다는 각오가 되어 있을 때는 객관적 어려움이 아무리 크더라도 별다른 갈등 없이 마음을 집중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타고난 재능이 있어도 집중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면 성숙한 지능으로 발전하지 못한다. 재능의 개발에는 집중력이 필요하다. 정신력을 모을 수 있어야만 음악적 재능이 있는 아이는 음악가가 될 수 있고, 수학적 재능을 가진 아이는 수학자나 물리학자가 될 수 있다. 집중력이야말로 모든 사고의 원동력이라 할 수 있다.
감정·목표·사고가 초점에 들어왔다 사라지며, 상반된 충동을 낳으면서 나의 관심을 여러 방향으로 흩뜨려 놓는다. 그러나 다른 길은 없는지 생각해 보자. 가령 스키를 타고 산비탈을 질주할 때 우리는 몸의 움직임, 스키의 위치, 얼굴을 스치며 지나가는 공기, 눈 덮인 나무에 주의를 집중한다. 갈등이나 모순을 의식할 짬이 없다. 조금이라도 마음을 놓았다가는 눈 속에 고꾸라진다. 그러니 누가 딴 생각을 하겠는가? 활강이 너무도 완벽하여 우리는 그것이 한없이 계속되기를 바라고 순간의 경험에 완전히 몰입한다.
이러한 순간의 공통점은 의식이 경험으로 꽉 차 있다는 것이다. 이때 각각의 경험은 서로 조화를 이룬다. 일상생활에서는 좀처럼 그런 경험을 맛보기가 어렵지만 그 순간에는 느끼는 것, 바라는 것, 생각하는 것이 하나로 어우러진다.
예외적으로 나타나는 이 순간을 나는 ‘몰입(沒入) 경험’이라고 부르고 싶다. ‘몰입’은 삶이 고조되는 순간에 물 흐르듯 행동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느낌을 표현하는 말이다. 그것은 운동선수가 말하는 ‘몰아 일체의 상태’, 신비주의자가 말하는 ‘무아경’, 화가와 음악가가 말하는 미적 ‘황홀경’에 다름 아니다.
우리는 적절한 대응을 요구하는 일련의 명확한 목표가 앞에 있을 때 몰입할 가능성이 높다. 체스·테니스·포커 같은 게임을 할 때 몰입하기 쉬운 이유는 목표와 규칙이 명확히 설정되어 있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하지 않고 참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종교의식에 참여하거나 음악을 연주하거나 산을 오르거나 수술을 할 때도 명확한 목표가 주어진다. 몰입을 유발하는 활동을 ‘몰입활동’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일상생활과는 달리 몰입 활동은 모순되지 않은 목표에 초점을 맞출 수 있게 해준다.
몰입활동의 또 하나의 특징은 되먹임, 곧 피드백의 효과가 빨리 나타난다는 것이다. 몰입활동은 작업이 얼마나 순조롭게 이루어지는지를 말해준다. 우리는 체스를 두면서 말 하나를 움직일 때마다 형세가 유리해졌는지 불리해졌는지를 안다. 등반가는 걸음을 한 보 내디딜 때마다 그만큼 높이 올라섰다는 것을 안다. 성악가는 노래의 한 소절이 끝날 때마다 자기가 부른 노래가 악보와 맞았는지 틀렸는지를 알 수 있다. 직장에서나 집에서는 우리는 단서가 주어지지 않으면 지금 하는 일이 잘 되는지 못되는지 한참을 모르고 지낼 때가 많지만 몰입상태에서는 대체로 그걸 알 수 있다.
몰입은 쉽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아주 버겁지도 않은 과제를 극복하는데 한 사람이 자신의 실력을 온통 쏟아 부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과제가 너무 힘겨우면 사람은 불안과 두려움에 젖다가 제풀에 포기하고 만다. 과제와 실력의 수준이 둘 다 낮으면 아무리 경험을 해도 미적지근할 뿐이다. 그러나 힘겨운 과제가 수준 높은 실력과 결합하면 일상생활에서는 맛보기 어려운 심도 있는 참여와 몰입이 이루어진다. 등반가라면 산에 오르기 위해 젖 먹던 힘까지 짜내야 할 때, 외과의사라면 순발력 있는 대응을 요구하는 수술이나 새로운 기법을 도입한 수술을 할 때, 바로 그런 경험을 한다. 보통 사람은 하루가 불안과 권태로 가득하지만 물입경험은 이 단조로운 일상에서 벗어나는 강렬한 삶을 선사한다.
목표가 명확하고 활동결과가 바로 나타나며 과제와 실력이 균형을 이루면 사람은 체계적으로 집중할 수 있다. 몰입은 정신력을 모조리 요구하므로 몰입상태에 빠진 사람은 완전히 몰두한다. 잡념이나 불필요한 감정이 끼어들 여지는 티끌만큼도 없다.
<결과가 시간이 많이 요구되는 큰 일(목표)의 경우는 흔들림 없이 지속적으로 그것을 일관성 있게 추구하기 위하여 그 만큼 뚜렷한 신념과 굳건한 의지가 필요하다.>
자의식은 사라지지만 자신감은 평소보다 커진다. 자신의 몸과 마음을 여한 없이 쓸 때 사람은 어떤 일을 하고 있건 일 자체에서 가치를 발견한다. 삶은 스스로를 정당화하게 된다. 체력과 정신력이 조화롭게 될 때 삶은 마침내 제 스스로 힘을 얻는다.
삶을 훌륭하게 가꾸어주는 것은 행복감이 아니라 깊이 빠져드는 몰입이다. 몰입해 있을 때 우리는 행복하지 않다.<행복 그 자체를 느낄 여지가 없다> 행복을 느끼려면 내면의 상태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고, 그러다 보면 정작 눈앞의 일을 소홀히 다루기 때문이다. 암벽을 타는 산악인이 고난도의 동작을 하면서 짬을 내어 행복감에 젖는다면 추락할지도 모른다. 고난도의 작품을 연주하는 음악가는 행복을 느낄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다. 일이 마무리된 다음에야 비로소 지난 일을 돌아볼 만한 여유를 가지면서 자신이 한 체험이 얼마나 값지고 소중했는가를 다시 한 번 실감하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되돌아보면서 행복을 느낀다. 물론 몰입하지 않고도 행복을 맛볼 수는 있다. 고단한 몸을 눕혔을 때의 편안함과 따사로운 햇살은 행복을 불러일으킨다. 모두 소중한 감정임에는 틀림없지만 이런 유형의 행복감은 형편이 안 좋아지면 눈 녹듯 사라지기에 외부 상황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몰입에 뒤이어 오는 행복감은 스스로의 힘으로 만든 것이어서 우리의 의식을 그만큼 고양시키고 성숙시킨다.
<몰입의 순간은 행복 자체에 대한 느낌이 없으며, 그 이후에야 반추하여 행복감을 느끼므로 그때의 행복은 기억에 의해 수반되는 현상이다. 따라서 진정한 행복이란 행복 그 자체를 느끼지 못하는 상태, 즉 행복의 감정을 초월한 절대적 상태야 말로 진정한 행복이 아닐까?>
각성의 상태에 놓인 사람은 정신을 상당히 집중하고 능동적이며, 대상에 밀착되어 있다.
이상적으로 보면 사람은 자기가 하는 일을 즐기면서도 꾸준한 성장의 길을 걸어야 마땅하다.
명확한 목표가 주어져 있고, 활동의 효과를 곧바로 확인할 수 있으며, 과제의 난이도와 실력이 알맞게 균형을 이루고 있다면 사람은 어떤 활동에서도 몰입을 맛보면서 삶의 질을 끌어올릴 수 있다.
3. 일과 감정
삶의 질은 칠십여 년 동안 우리가 어떤 일을 하고 그 일을 하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에 달려 있다.
<각성이란 그것이 어떤 일을 하든(생산활동, 유지활동, 여가활동 불문), 예를 들어 설거지를 할 때, 청소를 할 때에도 몰입의 수준으로 일을 하는 것이 바로 각성/깨달음의 효용이라고 생각한다. 즉, 언제 어디서나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몰입하는 궁극적인 깨침이다.>
신문을 읽거나 TV를 보거나 그냥 쉬면서 보내는 수동적 여가는 그런대로 즐거움을 주기는 하지만 정신 집중이 요구되지 않는 활동이라서 몰입으로 이어지기 어렵다. 사람들은 수동적 여가에서 별로 행복을 느끼지 못하면서도 그것을 원한다는 것이다. 집중력은 근무를 할 때, 운전할 때, 능동적 여가활동을 할 때 가장 높게 나타난다.
그러므로 삶의 질을 높이려면 먼저 가장 보람찬 경험을 할 수 있도록 하루의 활동을 설계해야한다.
밤에 일기를 쓰거나 하루의 일과를 반성하는 버릇을 들이면 내 기분에 영향을 주는 요인이 과연 무엇인지를 차분히 추려낼 수 있다. 여기서 가장 높은 점수를 얻은 활동이 명확히 드러나면, 바람직한 활동은 빈도를 늘리고 그렇지 못한 활동은 빈도를 줄이는 새로운 실험에 나설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하늘다움을 펼쳐내는 극단적 사례-몰입활동과 연계>
네델란드의 아주 규모가 큰 지역정신건강센터의 책임자로 있는 정신의학자 마르텐 데브리스는 그러한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하는 사례를 보고하였다. 병원당국은 ESM을 통하여 환자들이 하루 종일 어떤 일을 하고, 어떤 생각을 하며, 어떤 느낌을 받는지를 알아냈다. 십 년 넘게 그 병원에 입원해 있는 한 여인은 정신분열증을 심하게 앓고 있었다. 심각한 정신 질환을 앓는 사람들이 보통 그런 것처럼 그 여자도 머리가 아주 산만하고 감정도 무디기 이를 데 없었다. ESM조사를 받은 2주일 동안에 그 여자가 아주 만족스러운 느낌을 보고한 것은 딱 두 번이었다. 두 번다 손톱을 다듬고 있을 동안이었다. 의료진은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에 그 여자가 아예 손톱다듬기를 화장 전문가에게 제대로 배울 수 있도록 주선하였다. 환자는 강의를 열심히 듣더니 얼마 안가서 병원 환자들의 손톱을 도맡아서 다듬어주었다. 그 여자는 새 사람이 되어 전문가의 관찰을 받으며 다시 사회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나중에는 개업을 하였고 일 년도 못되어 생활의 기반을 잡았다. 왜 이 여자가 손톱 다듬기에 매료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그 여자가 인생의 어느 단계에서 손톱다듬기를 하면서부터 어렴풋하게나마 몰입을 경험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하루의 리듬은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고독으로 들어가기와 고독에서 빠져나오기다. 사람이 혼자 있으면 우울하다가도 여럿이 모인 곳에 가면 다시 생기가 감돈다는 건 수 많은 연구에서 확인된 결과다. 고립되어 지내는 사람이 행복을 느끼는 경우는 드물다. 의욕이 떨어지고 집중력도 저하되며 무기력해진다. 아무 할 일이 없을 때 그 사람의 마음은 우울한 상념에 점령당하기 시작하고, 의식 또한 혼돈스러워 진다. 정도는 덜하지만 누구에게나 관찰되는 현상이다. 아무것도 하는 일 없이 혼자 있을 때는 정신력을 집중할 필요가 없어서 마음이 서서히 무너지고 무언가 걱정거리를 찾게 된다. 보통 친구들과 같이 있을 때 가장 긍정적인 경험을 한다. 이럴 때 사람들은 자신이 행복하고, 붙임성 있고 의욕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우정의 중요성은 백번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자기의 고민에 귀 기울여주고 용기를 불어넣어주는 사람이 단 한 사람만 있어도 삶의 질은 이만저만 달라지지 않는다.
정말로 성숙해지려면 대화를 통해 자극을 얻을 수 있는 참신한 사고를 가진 상대를 만나야 한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가장 긴요한 것은 결국 고독을 견디는 능력, 아니 고독을 즐기는 능력일지도 모른다.
뛰어난 창조적 재능을 보여준 사상가와 예술가의 말을 믿어보자면, 마음에 드는 경관이야말로 영감과 창조력의 샘이다. ‘나를 둘러싼 자연의 다채로운 모습이 영혼 깊숙한 곳에 정감을 불러일으킨 듯 했고···’
산책과 휴가는 마음을 깨끗이 하고 관점을 바꾸며 자기의 상황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거추장스러운 물건을 버리고 자기의 취향을 살려 집이나 사무실의 분위기를 안락하고 편안하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타성에 젖은 삶에서 벗어나려는 사람이 가장 먼저 시도해야할 일인지도 모른다.
눈부신 일상생활은 결국 무엇을 하는가가 아니라 일을 어떻게 하는가에 달려 있다. 인생은 이런 식으로 살라고 누가 정해 놓은 규칙이 있는 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나에게 맞는 삶의 방식을 찾아내는 일이다. <자신의 하늘다움을 찾아내는 일이다.>
4. 일의 역설
아주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예술가·기업가·정치가·과학자는 사냥을 하던 선조들처럼 일을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삶과 혼연일체가 되어 있다는 뜻이다.
노벨상을 두 번이나 받은 생물학자 라이너스 폴링은 여든 아홉의 나이에도 이렇게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이젠 무얼 하면서 살아가지? 나는 자리에 앉아서 한 번 도 이런 고민을 한 적이 없다. 그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무작정 밀고 나갔을 뿐이다.”
인생에서 이룬 것 가운데 가장 자랑스러운 게 무엇이냐는 질문을 던졌을 때, 가장 많이 들은 답변은 물리학자 프리먼 다이슨의 다음과 같은 말이었다. “자식 여섯을 낳아서 누가 보아도 괜찮은 재목으로 키웠다는 게 제일 자랑스럽다.”
일에 전념하면서도 인생을 다채롭게 꾸려가는 균형 잡힌 삶이야말로 진정한 삶이라 할 수 있다.
5. 여가는 기회이며 동시에 함정
지금 우리가 직면한 문제의 하나는 남는 시간을 현명하게 쓰는 법을 터득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사람의 신경계는 외부 신호에 관심을 기울이는 방향으로 진화해 온 것이 사실이지만, 중간 중간 장애물이나 위험이 끼어들지 않은 상황에서 오래도록 한곳에 마음을 모을 수 있는 단계까지 적응하지는 못했다. 내부에서부터 정신력을 자유자재로 운용할 줄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살아가면서 이렇다 할 몰입의 대상을 찾지 못하는 사람일수록 부담스럽지 않은 수동적 여가에 의지하는지도 모른다.
앞으로 사람들은 점점 더 많은 시간을 여가에 쏟을 것이고 더 정교하고 인위적인 자극에 의존할 것이다.
일이 여가처럼 즐거우며, 일을 잠시 접어두었을 때 마음을 텅 비게 만드는 여가가 아니라 진정한 재충전으로서의 여가를 즐길수 있어야 한다.
집필은 고독한 작업이다.
7. 삶의 패턴을 바꾼다
우리가 하는 일이 덧없고 지루하며 스트레스 덩어리로 받아들여진다고 해서 가족을, 사회를, 역사를 욕할 수는 없다.
가장 현명한 길은 설령 경제적으로 아주 힘든 처지에 봉착하더라도 한시바삐 지금까지 해온 그 일을 그만두는 것이다. 인생을 길게 보면, 물질적으로는 편해도 마음은 편치 못한 일을 하는 것보다는 자기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백번 낫고 또 의당 그래야 옳다. 그런 결정을 내리기란 참으로 힘들며 자신에게 무서우리만큼 정직해야 한다.
이처럼 극적인 변신에 성공하지는 못하더라도 자기가 하는 일을 가치 있게 만들 수 있는 길은 얼마든지 있다.
활동이 이루어지는 전체 맥락을 늘 염두에 두고 자신의 행동이 전체에 미칠 영향을 이해한다면, 아무리 사소한 직업이라도 세상을 전보다 살 만한 곳으로 탈바꿈시키는 인상적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다.
누군가가 상황이 요구하는 수준 이상으로 관심을 기울이면 대수롭지 않은 사건이 삶을 뒤바꾸는 중대한 발견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이다.
로절린 얄로는 자신의 경험을 되돌아보면서 “무슨 일이 터지면, 바로 이거구나 하는 느낌이 온다.”라고 술회한다. 누구나 할 수 있는 말 같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신이 워낙 흐트러져 있어서 무슨 일이 터져도 그 사건의 의미를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하고 넘어간다.
사소한 변화에 주목하면 위대한 발견을 낳을 수 있는 것처럼, 조금만 태도를 바꾸면 지긋지긋하고 넌더리나던 일이 빨리 하고 싶어서 안달이 날 정도로 기다려지는 환상적 활동으로 변모한다. 그 비결은 무엇일까?
첫째,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고 그 원인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이해하는 데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둘째, 지금의 방식이 업무에 임하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수동적 자세에서 탈피해야 한다.
셋째, 대안을 모색하면서 더 좋은 방법이 나타날 때까지 실험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인생을 살다 보면 부담스러운 처지에 놓일 때가 많다. 도저히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 난제들을 만나기도 한다. 여기서 스트레스를 느끼지 않으려면 어떻게 할까? 맨 먼저 취해야할 조치는 머리를 어지럽히는 각종 요구들 속에서 우선순위를 매기는 일이다. 일을 잘 하는 사람은 자기가 처리해야 하는 사항을 메모로 조목조목 정리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반드시 이렇게 체계적으로 메모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기억력이나 경험에 기대는 사람도 있을 테고 그때그때의 직관에 따라 판단을 내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일종의 질서를 만들어내기 위해 나름대로 전략을 개발하는 일이다. 일단 우선순위가 정해지면 어떤 사람은 쉬운 일부터, 어떤 사람은 어려운 일부터 처리하는 사람이 있다. 중요한 것은 자기에게 어울리는 전략이 무엇인지를 발견하는 일이다.
일처리에 순서를 정하고 일을 끝내는 데 필요한 내용을 분석하며 해결 전략을 수립하는 데 좀 더 관심을 쏟아야 한다. 통제력을 잃지 않아야 스트레스를 피할 수 있다. 부담을 극복하는 데 필요한 정신력은 누구나 갖고 있지만 그것을 효과적으로 써먹을 줄 아는 사람은 극소수다.
창조적인 사람들이 살아온 과정을 보면 자기가 원하는 쪽에 일을 맞추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창조적인 사람들은 대체로 이미 나 있는 길을 밟은 것이 아니라, 걸어가면서 스스로 길을 만들어냈다.
우리는 흔히 회사나 기업을 발전시키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을 쏟아 부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가정은 ‘자연스러운 것’이어서 (정신적) 노력이 거의 필요하지 않다고 여긴다. 배우자가 계속 뒷바라지해 줄 것이고 부모에 대한 아이들의 애정도 식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가족이란 원래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가정을 화목하게 꾸려갈 의무가 가족 구성원 모두에게 에누리 없이 요구되는 요즘 사회에서는 가족 모두 정성을 기울이지 않으면 가정이라는 틀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것을 새로이 인식해야 한다. 서로에게 관심을 기울일 때, 혹은 같은 활동에 동참할 때 가정을 결속시키는 몰입의 경험도 그만큼 자주 할 수 있다.
대인관계에서 다른 사람에게 이득이 되도록 돕는 것이 사실은 자기에게도 가장 득이 된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 비일비재하다.
8. 자기 목적성을 가진 사람
우리는 열정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삶에 뛰어드는 사람의 성격을 자기목적성으로 충만해 있다고 말한다.
그 일 자체가 좋아서 할 때 그 일을 경험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될 때를 우리는 자기목적적이라고 한다. 가령 그저 놀이 자체가 좋아서 두는 체스는 나에게 자기목적적 경험이 되겠지만 만일 내가 돈을 걸고 체스를 두거나 그 세계에서 순위에 오르기 위해 체스를 둔다면 똑같이 두는 체스라도 자기 외부의 목적을 실현하려는 행위가 되어 외재적 목적성을 강하게 띨 수밖에 없다. 외부의 다른 목적을 달성하려는 의도보다는 일 자체가 좋아서 하는 사람이 자기목적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자기목적성을 가진 사람은 원하는 일을 하는 것 자체가 이미 보상이 되기에 물질적 수혜라든가 재미·쾌감·권력·명예 같은 별도의 보상이 필요하지 않다.
일에서, 가정에서, 남들과 어울리면서, 먹으면서, 심지어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혼자 있을 때도 몰입을 경험하므로 외부적 보상이 없어도 무장하다. 이런 사람은 더 자율적이고 독립적이다. 외부의 보상이나 위협에 쉽사리 농락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자기를 둘러싼 모든 것에 관여한다. 삶의 흐름에 깊숙이 빠져들 줄 안다는 소리다.
자기목적성을 특징짓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 바로 시간을 보내는 방법이다. 수동적으로 여가와 오락을 즐기는 사람은 자신의 실력을 연마할 수 있는 기회를 별로 얻지 못한다. 사람은 몰입을 낳기에 좋은 활동, 곧 정신노동이나 능동적 여가 활동을 할 때 비로소 몰입을 경험한다.
자기목적성을 가진 사람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특징이 있다. 지칠 줄 모르는 정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남들보다 마음의 여유가 많은 건 아닐 터인데도, 그들은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남들보다 더 많은 걸 알아차리며 눈앞의 이익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가 그저 좋아서 하는 일에 많은 시간을 투자한다.
자기목적성을 중시하는 사람은 ‘나’라는 울타리를 가볍게 뛰어 넘어 삶 자체를 향유할 수 있는 정신적 여유를 가지고 있다.
창조적인 사람은 대체로 자기목적성을 중요시한다. 획기적인 업적이 그들의 머리에서 나오는 이유는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일에도 정력을 쏟을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이런 관심을 사심 없이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본인의 이해관계에서 벗어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어떤 사람이 기울이는 관심의 내용이 당사자의 목표나 야심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있을 때만 현실을 있는 그대로 포착할 기회를 잡게 된다. 우리를 창조의 세계로 이끄는 힘은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에 철저히 몰입할 줄 아는 능력이다.
아무리 사소한 일일지라도 건성으로 임할 게 아니라 정신을 집중하여 처리하는 습관부터 몸에 익히도록 하자. 설거지·옷입기·청소처럼 단순한 일도 충분한 정성을 기울이면 응분의 보상을 얻을 수 있다. 그 다음에는 하기 싫은 일, 수동적 여가에 들였던 시간과 관심을 끌어다가 보람은 있지만 적잖은 부담이 따라서 자주 하지 못했던 일에다 투자하자. 우리에게는 시간을 잘 다스리는 지혜가 필요하다. 먼 훗날 재산을 불리고 안정을 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 삶을 즐기기 위해서라도.
삶을 그 자체로 즐길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지려면 시간이 있어야 한다.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마음을 통제하는 힘이다. 바깥에서 오는 자극이나 도전이 나의 관심을 앗아갈 때까지 방치하지 말고 스스로 먼저 관심을 기울이는 훈련을 해야 한다.
우리가 어떤 대상에 흥미를 느끼는 건 그만큼 공을 들였기 때문이지 저절로 그렇게 되는 건 아니다. 관심을 다스릴 줄 안다는 것은 경험을 다스릴 줄 안다는 것이며 그것은 곧 삶의 질로 직결된다. 정보는 우리가 그것에 관심을 기울일 때만 우리에게 다가온다. 우리가 기울이는 관심은 바깥의 사건과 우리의 경험 사이에서 필터 구실을 한다.
고통은 그것을 정면으로 응시하여 그 현실성을 인정한 다음, 우리가 선택한 다른 대상으로 한시라도 빨리 관심을 돌릴 때만 우리는 고통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있다.
고통스러운 사건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면 그것이 더욱 아프게 다가오며 우리의 의식은 그만큼 더 어수선해진다. 그런 사건을 부정하거나 왜곡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문제의 사건에 대한 정보가 우리의 마음 한구석에 도사리고 있으면서 마음의 에너지가 다른 영역으로 뻗어나가지 못하게 길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우리의 태도다. 만약 어떤 사람이 성자가 되기 위해 기도하고 훌륭한 이두박근을 얻기 위해 운동을 한다면 활동의 의미는 반감된다. 활동 그 자체를 즐길 수 있어야 한다. 결과는 대수롭지 않으며 나의 관심을 다스리는 데서 희열을 맛보면 그만이라는 자세로 임해야 한다.<????>
우리가 경험하는 내용의 대부분은 이미 오래 전에 프로그래밍된 것이다. 우리는 봐야하는 대로 보는 타성, 기억해야 하는 대로 기억하는 타성, 그런 타성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삶의 지배권을 되찾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우리 자신의 의지가 원하는 방향으로 마음을 기울이는 요령을 터득하는 것이다.
자기목적성이 있는 청소년들은 집중을 더 잘하고 즐거움도 많이 느끼며 자긍심도 높고 자기가 하는 일이 미래의 목표달성과 관계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실력을 높이고 우리의 가능성을 채워 우리를 성장시키면서 행복을 맛보는 일이다. 자라나는 세대에게는 이 점이 특히 중요하다.
9. 운명애
자기목적성이 뚜렷한 사람은 주변 사람들의 의식에서 무질서를 크게 줄인다. 많이 가지려 하고 자기 영토를 넓히는데 혈안이 된 사람은 사회 전반을 무질서하게 만든다.
과학기술이 가져온 놀라운 진보가 위세를 떨치는 시대라서 우리는 자신보다 더 위대하고 항구적인 무언가에 소속<???>되어 있다는 점을 간과하기 쉽다. 미국을 비롯한 선진 산업국가에서는 개인주의와 물질만능 주의가 공동체의식과 정신적 가치를 완전히 압도하기에 이르렀다.
어떻게 자기 의식을 흐트러뜨리지 않으면서 어수선한 주변 상황을 개선할 수 있는가? 불가에서는 그 비결을 이렇게 설명한다.
“우주의 미래가 내 손에 달려 있다는 생각을 한시도 접지 말되, 내가 하는 일이 대단한 일이라는 생각이 고개를 들 때마다 그걸 비웃어라.” 이처럼 진지한 유희장신이 살아 있고 근(면)심과 겸손이 조화를 이루어야만 사람은 어딘가에 전념하면서도 무심함을 잃지 않을 수 있다. 그런 사람은 뻔히 질 줄 알면서도 선의를 위한 싸움에서 희열을 맛볼 수 있는 사람이다.
스턴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고삐 풀린 에고를 어떻게 다스려 창조적 작업에 이용할 수 있는지를 설명한다.
물론 내 안에는 못되고 치졸하고 비뚤어지고 우유부단한 면이 수없이 도사리고 있지만, 나는 거기서 힘을 끌어낸다. 난 그것들을 바꿀 수 있다. 그것들은 힘의 원천이 된다. 이렇듯 작가가 휘어잡을 수 있을 때 그것들은 작가의 재료가 된다.
삶의 질을 끌어올리는 가장 손쉬운 길은 주인 의식을 가지고 행동하라는 것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우리는 다시 한 번 확인한다.
해결책은 간단하다. 자진해서 원하는 일을 늘려야한다. 무엇을 원한다는 사소한 마음의 움직임이 집중력을 높이고 의식을 명료하게 만들며 내면의 조화를 이루어낸다.
피치 못하게 해야 하는 일이 있을 때,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툴툴거리며 마지못해서 할 것인가 아니면 즐거운 마음으로 해치울 것인가. 둘 다 의무감에서 비롯된 행동이지만 후자가 더 긍정적인 경험을 낳는다.<같은 시간에 한 사람은 힘들고 고통스러운 경험을 하고, 다른 한 사람은 덜 힘들고 어느 정도는 즐거움도 맛보면서 일을 마친다. 어차피 피할 수 없으며 겪고 보내야할 같은 시간이라면 이왕이면 좋은 감정으로 좋은 경험을 하면서 보내는 것이 좋지 않은가?>
청소처럼 누구나 하기 싫어하는 일도 가장 빠르고 효율적으로 해치운다는 목표를 정해 놓고 하면 생각보다 고통스럽지 않다. 목표를 설정해 놓으면 일하는 괴로움이 상당히 줄어든다.
자신의 선택을 받아들이는 태도는 니체 철학의 중심개념이라 할 ‘운명애’에서 잘 드러난다. 충실한 삶을 살아가려면 어떤 자세가 필요한가를 논의하는 대목에서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운명애를 가진 사람은 위대하다는 게 나의 신조다. 불가피한 것을 견디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것을 사랑할 줄 아는 태도이다. 나는 피치 못할 일을 아름답게 받아들이는 법을 자꾸자꾸 배우고 싶다. 그럼 나도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사람이 될 수 있을 테니까.”
에이브러햄 매슬로의 연구도 비슷한 결론에 이르렀다.
절정감은 자아와 환경의 일치를 뜻한다. 그것은 ‘내적 필요성’과 ‘외적 필요성’ 혹은 ‘내가 원하는 것’과 ‘내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 사이의 조화를 의미하기도 한다고 매슬로는 말한다. ‘그 경지에 이른 사람은 자유롭고 행복한 마음으로 자신의 운명을 흔쾌히 받아들인다. 그는 자신의 운명을 자기 의지대로 선택한다.’
니체와 매슬로의 말대로 운명애는 자의에 의한 것이든 타의에 의한 것이든 자기 행동의 주인 의식을 가지려는 자세에 다름 아니다. 진정한 희열과 인격의 성장은 무질서한 일상생활의 중압감에서 벗어날 때만이 기대할 수 있다. 우리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을 사랑할 줄 알 때 삶의 질이 높아진다고 한 니체의 말은 백번 옳다. 중요한 것은 자기 나름의 길을 걸어간다는 것이다. <자기만의 하늘다움을 펼쳐내는 것>
우주에 대해 이미 밝혀진 지식만으로도 우리는 어떤 행동이 복잡성과 질서를 높이고 어떤 행동이 파괴를 낳는지 너무나 잘 안다. 우리는 생명체 상호간의, 또 환경과의 긴밀한 유대 관계를 재발견하고 있다. 질서와 에너지를 창조하기는 어려운 반면 무질서는 한순간에 도래한다는 걸 알았다. 만물은 긴밀하게 얽혀 있으므로<불교의 연기론, 제법무아> 어떤 행동의 결과가 당장은 눈에 모이지 않아도 먼 곳에서 파급효과를 낳는다는 걸 이해하게 되었다. 이것은 삶을 사려 깊게 관할한 북미 인디언·불교·조로아스터교가 이런저런 방식으로 아득한 옛날부터 이미 강조한 바 있는 가르침이다. 우리에게 이런 사실을 설득력 있는 언어로 체계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오늘의 과학이 풀어야 할 숙제다.
우리는 진화 과정의 산물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창조적 진화라고 해도 좋다. 이제 우리는 과정 자체가, 아니 과정의 일부가 되었다. 우주적 진화를 크게 나누자면 먼저 내가 소위 전(前)생물학적 진화라 부르는 물리적·화학적 진화가 있고, 그 다음에 생물학적 진화, 그리고 뇌와 정신의 메타 생물학적 진화가 있다. 여기에다 덧붙이고 싶은 것이 이른바 신학적 진화, 즉 목적을 가진 진화다. 내 목표는 진화와 창조성을 목적론적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리라.
인간 사회에서 나타나는 악은 물질계에서 나타나는 엔트로피(무질서)에 비유할 수 있다. 엔트로피와 악에 저항<다스림>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모든 체계는 엔트로피와 악으로 되돌아 가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거기에 맞서는 것이 우리가 ‘선’이라고 부르는 힘이다.<????>
거대한 진화의 틀 속에서 자신을 파악하는 사람의 의식은 작은 개울이 거대한 강물로 합류하듯이 우주와 하나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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